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다시 한번 인간의 악한 본성을 이용해 인류 사회에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세계 정세라는 거대한 무대에서부터, 우리 이웃의 가정 폭력에 이르기까지 그 악영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때 저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며 늘 윤리적 책임을 다한다고 믿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진화와 발전을 통해 인류가 찬란한 계몽의 시대에 이를 것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관점은 한 철학 강좌를 통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당시 교수님은 "적절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뉴질랜드에서도 나치 정권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 중 누구라도 무고한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죽이는 전쟁 범죄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약 20명의 학생은 결국 두 질문 모두에 "그렇다"고 답했고, 그 의미를 깨달은 우리 모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경험은 제가 부활절 이야기의 '이유'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17장에서 선지자는 유다가 왜 하나님을 거부하고 이방 이웃들의 영적 세계관에 동화되었는지 직시합니다. 당시 평범한 사람들은 인신공여와 가증한 의식을 통해 신을 달래는 도구로 전락했고, 정치 지도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절대 권력을 탐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 처절한 분석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셨습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처럼, 미래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3장(원문 28장 참조)에서 선지자는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를 언급합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레미야의 미래에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성금요일과 부활 주일을 '성육신'의 절정으로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신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을까요? 그것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소망을 성취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믿는 모든 이방인에게 참된 정의와 평화를 주는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 되었고, 우리 믿는 자들은 이 땅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 뒤를 돌아봅니다. 어떤 면에서 지금 우리에게 그날은 예레미야 시대만큼이나 멀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여, 언제 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겠나이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고난은 시간이 갈수록 제 마음을 더욱 울립니다. 특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이 그러합니다. 그것은 인성(Humanity)의 부르짖음이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Divinity)의 외침이었을까요? 그것은 둘 다입니다. 죄 많은 인류가 심판대에서 직면할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묘사하는 심판은 바로 '버려짐'입니다. 인간의 본성적 선함을 믿는 이들에게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직접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기에, 그 고통의 외침은 모든 영적 영역에 울려 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에게 생명과 평화를 주시기 위해 화목 제물이 되어 심판받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 생명과 평화를 선물로 받습니다.
부활 주일을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그래왔듯이 부활 예배를 인도하기 전, 저는 개인적인 성찰과 경외의 시간을 갖습니다. 침묵 속에 앉아 마음과 영혼으로 그 유명한 전례 문구를 되뇝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네! 진실로 부활하셨네!"
제가 왜 이토록 확신을 가지고 믿는지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빈 무덤을 목격한 첫 증인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첫 나타나심을 기록한 복음서 말씀이 그 근거 중 하나입니다. 또한, 제 삶 속에서 일어난 초자연적인 기적과 기도 응답들이 저를 믿게 합니다.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간증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충분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삶의 여러 역경 속에서도 성령의 계시는 제 이성을 넘어 영혼 깊은 곳까지 닿았습니다. 간단히 말해, '아는 자'로서 그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이번 부활절, 단순히 지적인 동의에 머물러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권면합니다. 교회와 온 인류에게 주시는 성령의 계시를 발견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혹시 아직 부활의 이야기가 믿음으로 다가오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전 세계 교회의 증언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힘겨운 부활절을 보내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의심이 있는 분들이여, 발견을 위한 여정을 멈추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비유를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작곡가 차이콥스키와 헨델이 천국에서 예배를 드린 후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사들의 찬양은 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고, 그들은 영원히 변화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지상에서 기독교 음악에 크게 기여한 거장들이었습니다. 헨델은 '메시아'의 '할렐루야' 합창으로, 차이콥스키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전례' 중 '그룹의 노래(Hymn of the Cherubim)'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전통 속에서도 두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메아리쳤습니다. 헨델이 차이콥스키에게 '그룹의 노래'를 작곡한 영감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맹인들이 새벽을 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언을 통해 '새벽'을 보았음을 확신합니다. 저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나의 구주이자 주님을 만날 그날, 점점 더 밝아올 그 새날을 고대합니다.
피터 던 (Peter Dunn)
뉴질랜드 장로교 총회장